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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산강에세이
글쓴이     정근영 2014-05-10 오전 10:5 (조회 : 1594)
제목     갑오경장
올해는 단기로는 4347년이며 서기 2014년 갑오년이다.
지금으로 부터 꼭 120년전,
두 갑자전인 1894년에도 갑오년이었고 그 때가 고종이 즉위에 오른지 31년 째 되는 해 이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인하여 피폐된 조선을 되 살기기 위하여 그동안 폐쇄되었던 조선을 대 내외적으로
문호를 완전 개방하고 개혁한다는 뜻에서 당시 갑오년에 고종이 갑오경장을 전격 선포하여 이미 기울져간 조선에 기사회생을 노렸던
의미있는 해이기도 하다

정조 이후...

순종 헌종 철종에 이르러 고종이 즉위 할 때까지 60여년 동안 뚜렸한 정치적인 이슈도 없었고
안동김씨의 위세를 등에 업은 탐관오리들의 극성에 민심은 말도 못할 만큼 피폐해져 있었다.

따라서 굶주린 백성들이 도처에 반란을 일으켰고 주요 길 몫 마다 농민들이 전향한 순진한 산적때가 드글거렸는데...
그만큼 먹고 사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이 어렵고 힘든 개화기 시절
먹고살기 위해 일어났던 민란들을 살펴 보면...

부패한 조정에 항거한 사건으로 순조 때 일어난 홍경래란.
군인들의 월급이 일년씩이나 밀려 때거리가 없어 굶어 죽는 군인 가족들이 속출하자
조정에 항거하기 위하여 고종 때 일어난 임오군란.
고종 때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외치던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
녹두장군 전봉준이 농민과 합세하여 학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일으킨 동학란.

이렇게 먹기살기 위하여 민중들이 일으킨 반란들이 역사에 기록된것 만도 이러한데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민중 사건들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많다 하겠다.

이와같이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져 있던 차에 1863년에 고종은 12세 때 왕위에 올랐으나 아직 나이가 어려 정치를
할 수 없으므로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가 10여년 동안 섭정을 하였다.


어지러운 조선을 고종을 대신해 섭정을 시작한 대원군은 당시 강대국들로부터 외교적인 교섭을 많이 요청받았지만
집안꼴이 엉망인데 외교는 무슨외교?? 하면서
일체의 교섭을 거절한 쇄국정책을 펴고 도처에 일어난 민란들을 제압하는 데 만 온통 신경을 썼다.

당시 서양에서는 동양의 역사적 문화 유산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조선의 문화제가 비싼 값에 거래 되곤하여
독일의 어떤 골동품 수집상 하나가 알게 모르게 조선의 문화제를 반출하였고
심지어 대원군의 아버지의 무덤까지(사도세자 셋째아들) 도굴하다 적발된 사건이 있었는데
분노한 대원군은 효에 기인한 유교적 사상에서 조상을 편안하게 지키지 못했던 심한 자책감으로 무척 괴로워했다 한다.
이러한 치명적인 사건들로 하여금 서구 강대국과의 교류를 더욱 봉쇄하게 된것도 한 원인일 것이다.

천주교를 박해 하면서 프랑스 신부 8명을 새남터에서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처형하여 세계를 경악케 하였고
이에 프랑스 함대 사령관 루즈가 대원군에게 사과를 받으로 온 걸 대포로 까부순 병인양요.
(이 사건은 프랑스해군이 강화도를 침공케하여 왕실 일급 문화제인 외유장각도서를 약탈해 가는 빌미를 주었다.)

미국이 통상요구를 하며 강화도에 제러럴 셔먼호를 상륙시키자 또 대포를 쏘며 미국을 쫓아낸 신미양요 사건.
등으로 대원군은 외교와는 완전 담을 쌓고 국내에 반란들을 제압하는데 전력했다.

(((대원군은 이렇게 도가 넘칠만큼 외교를 단절하고 국내 문제에 매달렸던 이유는 위와같은 서구열강의 위협문제로
대원군으로 하여금 열강에 대해 경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을 테고
또...상가집 개라고 불릴 만큼 미친 거지 행세를 하며 안동김씨를 속이고 셋째아들 고종을
어렵게 왕위에 올려 놓았는데 그 권좌를 지키려고 반대파인 안동 김씨를 몰아 내고 아버지로서
아들 고종의 왕위를 굳건히 하려고 외교는 배제하고 국내 문제에 강력 대처했다고 보여지는데...
후일 안동김씨 파인 며느리 명성황후와 관계가 좋지 않았을 뿐더러 고종과도 사이가 너무 안좋아지자
대원군은 고종을 폐위하고 첫째 아들을 재 책봉하려고 했던 일도 있다.)))
이러한 심리적 부담을 안은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펴긴하였으나 나름대로 소신있게 정치를 하였던 바...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부패관리를 적발하여 파직시켰고
서원 철폐하여 국가 재정 낭비와 당쟁의 요인을 없앴으며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였고 양반에게도 세금을 받은 건과
지방관리들과 결탁된 안동김씨의 세력을 와해하여 부정 부폐를 척결하여 백성들을 안정되게 하기도 하는 등등은
대원군의 나름대로의 업적이라 할수 있겠지만 무리한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어려운 제정에 시달리게 되었고
고종의 자리를 굳건히 하려고 국내 문제에만 신경을 쓰기위했던
쇄국정책은 조선의 근간을 흔들어 버리고 차후 일제에게 주권을 빼았기게 되는 치명적인 과오를 불러 일으켰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모진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고종은 대원군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마누라도(명성황후)일제에게 죽임을 당하고 대원군도 물러나자 피폐해진 마음으로 한동안 정신을 놓고 살았지만...

그래도 조선의 왕으로서 큰 힘은 없었지만 나라를 살릴려고 나름대로 무진 애를 쓴 왕이었다.

한 예로 ...
당시 선국 강대국들이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러시아 청나라등 20여개국 ) 네델란드 헤이그에 모여 만국 평화회담을
개최할 때 고종이 을사보호조약이 무효라는 주장을 가지고 이준열사 등을 파견하였지만 사전에 일제에게 탄로가 나
각국 대표들에게 어필하지도 못한 체 불발로 끝났다.
만약 왕의 인가도 없이 일본 맘대로 강제로 책정된 을사보호조약이 무효라는 조선의 주장이 각국 대표들에게
인정 되었다면 조선은 일제에게 주권을 뺴앗기지도 않았을 것이므로
헤이그 밀사 사건이 불발로 돌아간 것이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고종을 꼼짝못하게 감시하였고 끝내는 고종을 독살(1919년) 했다고 한다
고종의 독살로 사망하자 그 충격으로 민심이 한테 모여 그 해 유관순의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계기가 되기도했다.)))

이런식으로 많은 아쉬움을 남긴 역사적 사건들이 대충 이렇게 매듭지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고종은 쇄국정책을 탄핵하고 문호를 완전 개방하는 갑오경장을 전격 단행시켰지만...
이미 국운의 대세는 기울어져 걷잡을 수 없게 빈 껍질 갑오경장이 되어버렸고
결국 어쩔수 없이 강화도 조약에 서명한 고종은 서서히 나라를 잃는 아픔을 맛 보았다.
.

.

.

이렇게 고종이 단행한 갑오경장은 개혁을 한다는 뜻으로 갑오년에 단행되었다 하여 갑오경장이라하는데...
나름대로 쇄국정책으로 피폐해진 조선에 커다란 변화를 주어 심기일전 재기를 노린 정책이었지만
유명무실한 정책이 되어버려 큰 아쉬움이 남는다.

후일 박정희 대통령도 새마을 운동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하면서 선조의 얼을 되새기는 차원에서
갑오경장의 깊은 뜻을 새겨 타성에 젖어 있던 암울한 정신세계를 개혁이라는 단어를 경제에 적극 대입하라는
지침을 각 내각에 내린 적도 있으며 이것을 계기로 후일 크게 경제개발에 성공을 거두웠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경제의 근간이 이 갑오경장의 뜻에 기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갑오경장...

고종의 갑오경장이 단행 된지 120년이 된 올 해 2014년 갑오년 6월...
한 해가 벌써 반이 다 지나가는 오늘 이 즈음에서 해가 갑오년인 만큼
이 글을 읽으시는 몇 안되는 님들께서 갑오경장의 의미를 새로 음미 해 보시고
그동안 살아온 각자의 인생살이 들이 참 잘 살아왔겠지만...
갑오경장의 뜻 처럼 다시한번 자신을 개혁한다는 뜻에서
자기 인생을 한번 쯤 되짚어 보며 미비했던 점 보완하는 계기로 삼아 후회스럽지 않은 멋진 인생을 잘 사시길 기원합니다.


정근영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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