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방문자수4541815 명
오늘 방문자수187 명
자유게시판
산강에세이
아름다운 글
자연의 향기
명작명화
음 악
상 식
웃어봐요
종 교
태그교실
인생이란
TV시청
쉼터
산강자료방
 
 대마도는 대한민국 땅
 내 마음은 보석상자
 당신만 보면
 
등록된 글이 없습니다..
 
 날씨에 관한 모든 것
 증권시세, 취업정보, 날씨
 꼭~!! 성공하세요^^
산강건설의 홈페이지에 방문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많은 관심이 담긴 좋은 글들 남겨주세요~



[new]산강에세이
글쓴이     정근영 2011-07-29 오후 11:3 (조회 : 1758)
제목     외규장각 도서
강화도령 철종이 25대 왕으로 즉위에 올랐던 시대.

철종은 정치에 어둡고 심신마저 병약하여 안동 김씨의 견제를 받아 제대로 정치를 할 수 없자 민심이 극도로 혼란하여
최재우의 동학난을 비롯한 크고 작은 민중 반란들이 각 지방마다 빈번하게 일어났던 시기이다.

안동 김씨의 내정 간섭과 파벌 싸움이 극에 올랐던 당시의 조정을 평정 할 길이 없었던 철종으로서는 모든 의욕을 잃고 주색으로 일관하니 왕에 오른지 14년 만에 1863년 후사 없이 33살의 젊은 나이에 병사했다.

서출의 혈통이지만 간신히 이씨조선의 왕위를 이어왔던 철종에서 대가 끊어지자 조선이 망한다는 루머와 함께
민심이 갈수록 험악해지고 위기감이 고조 되자 조정에서는 단 하루도 왕의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생각하여

영조(21대) 이후 적통으로 이어진 왕이 어차피 없었기 때문에 역시 서출 출신이지만 영조의 6대 손이며
흥선 대원군의 둘째 아들 고종을 다급한 나머지 할 수 없이 조선 26대 왕으로 옹립했다.

대원군의 할아버지는 철종의 할아버지 은현군과 이복 형제로서 둘 다 영조의 서자였고 정조 서거 이후 순종이
즉위 할 당 시 은근히 왕권을 찬탈 하려던 은현군은 역모죄로 다스려져 은현군 가계가 전멸되었다.

(이 때...어린 철종만 강화도로 유배 되었다가 헌종도 후사없이 죽자 왕으로 책봉 됨 ㅎㅎ)

철종마져 죽고 은현군의 가계가 전멸하자 그나마 서출이지만 왕의 혈통과 비교적 가까운 대원군의 가계만
남아있게 되었지만 당시 안동 김씨의 입김이 왕의 존재를 뒤흔들 만큼 위력이 거셀 뿐더러 말 잘 듣는 왕을 옹립하려는 수작을 부리고 있는 터였기 때문에 대원군의 아들인 고종이 왕위에 오른다는 장담을 못 하였다.

대원군은 철종이 오래 못 갈 것을 예측 하고 자기의 둘 째 아들 고종을 왕으로 세우기로 마음 먹고
철종이 병으로 죽기 몇 해 전 부터 안동김씨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상가집 개' 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바보같은 행동을 계획적으로 하고 다니면서 왕실의 최고 어른인 헌종의(24대) 생모 조대비에게 많은 로비를 하여
안동김씨 내부에 분란을 일으켰다.

마침내 철종이 죽자 이 틈을 이용 해
12세의 어린 나이의 고종을 그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가 왕위에 올리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어린 고종의 섭정을 하면서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대원군은 안동김씨를 분쇄시키고 극도로 흉흉한 민심을
잡기 위한 방편으로 민중 반란 제압, 서원철폐, 천주교 탄압, 외교 단절등 쇄국정치로 무리수를 두기 시작 하였다.

서원철폐와 민중 반란은 국내 문제로서 유림의 반발만을 가중시켰지만...
천주교 탄압은 그야말로 국 내외 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때 마침 김대건 신부에 의하여 천주교가 민중 깊숙히 전파되자 양반 및 서민층에 설득력을 얻어 급속도로
민중속으로 파고들어 그 수가 단기간에 수 만명에 이르기까지 했다.

천주교인들을 색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한양을 드나드는 백성들을 4대문 앞에 종이에다 십자가를 크게 그려놓고 밟고
지나가라 하여 이에 불응하는 천주교인들을 축출하였고 급기야는 김대건 신부를 새남터 순교성지에서 효수하여
이를 따르는 많은 백성들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더 더욱 강도를 높여 천주교인들을 전국적으로 탄압한 수가 무려 12,000명이나 이르렀고 그 중 1,900명을
김대건 신부의 뒤를 이어 참수하여 서방국가들이 깜짝 놀랄 엄청난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이 때 프랑스 선교사 베르뇌 신부를 비롯한 22명의 프랑스 신부들을 참형하는 사건도 같이 발생하였는데...
간신히 프랑스 신부 7명이 도망쳐 나와 중국 천진항에 거주하고 있던 프랑스함대 사령관인 로즈에게

이 사실을 고해 프랑스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프랑스 정부는 즉각 조선에 배수량 2,000톤급 함선 7척과 해군 5백여명을 급파하였다.

조선에 도착한 로즈 함장은 경복궁과 가까운 마포나루와 서해안 일대의 지리적 요소를 자세히 파악하는 등
작전 지도를 작성하였고 험악한 전쟁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많은 백성들을 겁에 질리게 한 후


대원군에게 선교사 학살에 대해 엄청 비난을 하고
인권탄압에 대한 사과와 보상, 책임자 엄벌, 천주교인 학살 중단등을 요구하였다.

요구 사항을 들어주지 않을 시...

황해도 해안 또는 평양 등지에서 반입하는 주요 물자의 길 몫인 강화도를 함락시켜 한양을 고립 시킨다며 협박 하였고
또한 강화도에 함대 기지를 설치하여 주둔하면서 자국민의 천주교 신부들을 보호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은 빗장을 더욱 굳게 걸어 잠그었을 뿐더러 그들의 요구는 안전에도 없고 더욱 더
천주교 박해에 강도를 높였으며 오히려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도록 강화도 지역에 군사들을 배치하였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조선에게 분노하며 로즈는 강화도 침공 계획을 세웠다.

육지인 김포 반도의 통진부와 ~ 강화도 초지진 (갑곶돈대) 사이의 해협은 불과 200여 미터의 가까운 해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프랑스 함대가 강화성을 치기 위해서는 이곳을 통과하면 쉽게 강화성에 도달 할 수 있었다.

강화성 반대편 해안에 상륙하여 산을 기어 올라 강화성을 침공하는 길도 있었으나 배로 지나가기만 하면 쉽게 바로
강화성에 도달 하여 폭격 할 수 있으니 위험을 무릅쓰며 무거운 대포 등 장비와 함께 해군을 육지로
이동 시킬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로즈는 협곡을 통과 하기로 작전을 짰다.

조선의 화력은 사정거리 100 여 미터의 대포 20 여문이 있었는데...
이 화력으로는 프랑스 함대에 손상을 입히기는 어려웠으나

조선의 장수 이 아무개는
(강화도 원주민들은 초지진 승리 장수를 그냥 이장군으로 기억하고 있음)

협곡을 통과 할 수 밖에 없는 로즈의 작전을 눈치 채고 초지진과 김포 통진부 해안에 포 20문을 해변 가까이 위장 집중
배치하고 프랑스 함대가 지나 갈 때 갑곶돈대 에서 (대포를 설치하여 놓은 곳)일제히 대포 사격을 하였다..

당시에는 프랑스 전함이라도 증기선으로서 속력이 지금의 전함과 같이
빠르지 못 하였고 협곡이나 다름없는 좁은 곳을 느리게 통과 할 때

집중 사격을 하여 프랑스 전함 2척에게 화염을 발생시키고
30여명을 사망하게 하는 조선으로서는 큰 전적을 세웠다.

협곡을 통과 할 무렵 해류가 썰물로 바뀌어 프랑스 함대가 돌진을 못 하고 제자리에 우왕 좌왕
서 있는 상황이 되니까 화력은 별로 없지만 집중 포격을 받게 되니 피해가 컷던 것으로 생각된다.

예나 제나 지형지물을 이용한 전술은 한국인 특유의 비법이었던 모양이다.
강화성 전투에서 협곡을 이용한 이장군의 승리와,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의 유명한 율돌목 해전이나 수나라 양제의 100만대군을 물리친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등은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 대승을 거둔 예 인데 전사에 길이 남는 대 승전이다.

막대한 피해를 본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는 화딱지가 있는대로 나 협곡을 통과하기엔 대 선단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여 단 두척만의 함선으로 진격하면서 무차별 폭격으로 공격을 하였다.

화력면에서 월등히 열세인 조선군은 800 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투 시작한지
단 이틀만에 강화성을 내주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쉽게 함락시키자 사기가 올라 김포까지 진격하던 중
육군이 아니라 해군이라 작전의 한계를 느끼고 더 이상 진격을 하지 못하고 머믓거리자

이 때 조정에서 급파한 포수들을 문수산 일대에 배치하여 밤 마다 기습작전을 펼쳐
프랑수군에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혔다.

전투력을 상실 할 만큼 피해를 입은 로즈는 화가 바짝나 남아있는 소수의 병사로 민가를 불사르고 무기를 탈취하고
금괴와 서적과 양식등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였다.


충분한 전리품을 챙긴 프랑스함대 사령관 로즈는 철군을 결심하였고
강화성에 보관되었던 외규장각도서 350권이 이때 탈취되어 프랑스로 가게되었다.

1866년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으로
이것을 고종 3년에 일어난 이른바 병인양요사건이라한다.

당시의 전투 상황을 흥미롭게 생각한 나는...
프랑스 함대와 교전했던 초지진 의 갑곷돈대나 또는 문수산에 수 차례나 직접 가서 당시의 전황을 추리하며

짐작 각본 해 본 것으로서 역사의 사실적인 고증과 더러는 일치함에 있어 내 추리력도...
뭐...그정도면 괜찮넹~ 이래 자화자찬 해본다. ㅎㅎ

이렇게 프랑스로부터 약탈 당한 중요 '외규장각도서' 가
올 봄에 145년 만에 다시 고국으로 반환되었다고 한다.

외규장각이라 함은 도서관을 뜻하며
외규장각도서는 말 그대로 도서관에 보관된 책 이라는 뜻이다.

외규장각도서에는 조선 왕실의...

어람용 의궤와
(왕실의 대소사를 소상히 칼라판으로 그림 겸해서 적은 것)


분상용 의궤
(사적 실록등을 제작한것 ) 가 있는데...

정조(22대) 때 지어진 외규장각(도서관) 을 왕실의 혼이 배여있다 하여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유실과 분실의 위험이 적을 뿐더러 수시로 어람용을 관람 할 수 있도록

한양에서 멀지않은 강화섬을 택하였고 도서관을 크게 지어 책자를 비밀 보관케하였으며
도서관을 지키기위한 군사를 강화성 주둔 군사 외 따로 200기를 더 배치하는 등 각별한 신경을 썼다.

이렇듯... 왕실의 얼이 보관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도서관인데 프랑스군에게 탈취된 사건은
조선왕실의 자존심을 송두리 째 짖밟아 버리는 치욕적인 수모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번에 반환된 의궤는 모두 칼라판 어람용이며 200년이 지난 지금도 변색되지 않는 당시의 칼라
인쇄 능력을 어람 연구 건 이외에 따로 분리 연구해야 한다는 학자들도 많다.

분상용 의궤는 아직 되 찾아 지지는 않았지만...
추후 이 건에 대해서도 프랑스 정부와의 반환요구를 끊임없이 하여야 할 것이다.

외규장각도서 반환 운동을 평생을 받쳐 프랑스에 요구했던 어느 박사님의
투철한 애국심에 삼가 경의를 표하는 바이며...

사설 필요없이 그냥 간단하게 외규장각도서를 프랑스로 부터 반납 받았다. 라고 간단히 써도 되겠지만...

원래 구질구질하게 길게 써 대는 게 제 특기인지라 제목만 보고 재미 없다고 판단하여 님들께서 읽기를 당장
포기 할 걸 알지만 그런거와 관계없이 저의 문제 덩어리인 특기를 또 부려 봤습니다. ㅎㅎ

다시는 우리의 것을 함부로 뺏기는 약한 한국이 되지 않기를 기원해 보며...
애착을 가지고 자주 들락거리는 강화도에 일어 났던 옛 사건을

꿈에서 같이 놀았던 철종의 여인...
양순이를 생각하며 써 봅니다. ^^

--정근영--


Copyright 2000-2006 eMnet Inc. All Rights Reserved.
대표 : 정근영 | H.P : 011-335-6999 | 주소 : 경기도 김포시 사우동 201-39 | 팩스 : 031-985-0706
김포사무소 : 031-985-0712 ~3 | 서울사무소 : 02-3662-0571~2 | 인천사무소 : 032-513-7707~8
Copyright 2003 Sankang.co.kr All Rights Reserved. [mail]